- 경희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 받는 공간 본관. 그런데 우리는 본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본관, 문화재가 되다
1953년 11월 24일, 경희는 학교 지을 터만 확보해 둔 상태에서 석조전 기공식을 거행했다. 아직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신생 대학이 계획한 엄청난 규모의 석조전 모습을 보고 다들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외국인의 손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설계, 우리의 기술, 우리의 손으로 짓겠다고 하니 … 역시 공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계의 힘을 빌리기 어려워 그 무거운 돌을 소달구지로 날랐다. 본관 앞에서는 석공들이 연신 돌을 쪼았다. 벽을 쌓을 때도 인부들이 직접 어깨에 메고 날라 하나하나 쌓아야 했다. 그 후로 3년, 온갖 시행착오와 난관을 이겨내고 결국 본관이 완공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한 층 한 층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본관 석조전은 경희의 자랑스런 유산이자,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유산으로 손꼽힌다. 2018년 12월 31일 본관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의 손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설계, 우리의 기술, 우리의 손으로 짓겠다고 하니 … 역시 공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계의 힘을 빌리기 어려워 그 무거운 돌을 소달구지로 날랐다. 본관 앞에서는 석공들이 연신 돌을 쪼았다. 벽을 쌓을 때도 인부들이 직접 어깨에 메고 날라 하나하나 쌓아야 했다. 그 후로 3년, 온갖 시행착오와 난관을 이겨내고 결국 본관이 완공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한 층 한 층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본관 석조전은 경희의 자랑스런 유산이자,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유산으로 손꼽힌다. 2018년 12월 31일 본관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생각보다 작은 본관 석조전?

1956년, 본관이 완성되었을 때 학교 관계자들은 매우 당황했다. 본관이 생각만큼 웅장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관 뒤로 고황산이 버티고 있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완공을 코앞에 둔 본관 석조전을 확장할 방법은 없었다.
발상의 전환!!!
무려 2년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해법을 찾았다. 본관 앞에 땅을 파고 분수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시각적으로 본관이 솟아 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1958년 분수대가 완공되자 본관은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 보였다. 덕수궁 석조전보다 낫다는 입소문에 관광객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1973년, 본관 완공 17년 후 본관 석조전 증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날로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본관 역시 확대되어야 했다.

양쪽으로 날개를 덧붙여 공간면적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전체적인 안정감을 확보해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 지금 본관의 모습은 이 때 완성된 것이다.



1958년 분수대가 완공되자 본관은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 보였다. 덕수궁 석조전보다 낫다는 입소문에 관광객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1973년, 본관 완공 17년 후 본관 석조전 증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날로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본관 역시 확대되어야 했다.


양쪽으로 날개를 덧붙여 공간면적을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전체적인 안정감을 확보해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 지금 본관의 모습은 이 때 완성된 것이다.
경희정신을 담은 본관 석조전

경희대학교의 정신은 한마디로 ‘문화세계의 창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글귀는 교시탑에 잘 새겨져 있다. 그런데, ‘문화세계의 창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본관에 가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
본관 중앙의 부조상을 자세히 보세요

삼각 벽면의 우측은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한 인류문명의 진보를 의미한다. 좌측면은 학문과 예술을 통한 고차원적인 정신문화의 발전을 표현하고 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인류의 삶을 발전시켜 나갈 때 문화세계가 실현된다는 경희대학교의 이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