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 – 1953] 피란지에서 꽃핀 경희정신
경희대학교는 1949년 5월 설립되었다. 그러나 신생 대학 경희가 채 자리도 잡기 전, 이듬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의 충격으로 교수진과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신생 경희는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을 재정비해야 했다. 1951년을 전환기로 삼아 교수와 학생을 모으고, 대학교육도 정상화했다. 1952년 12월 9일, 2년제 초급대학이던 경희를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전쟁 속에서도 충실히 대학을 발전시켜나가던 경희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광동에 위치한 임시 목조교사가 1953년 1월 불의의 화재로 하나도 남김없이 불타 없어진 것이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학교를 보고 실의와 낙담에 빠졌지만, 경희가 다시 일어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불과 2개월 반 만에 동대신동에 새로운 교사를 다시 세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 교훈, 교가, 교기, 교표 등이 피난지 부산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설립된 신생 대학이 전쟁과 화재의 혼란 한가운데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금의 경희를 지탱하는 정신과 비전을 창조해낸 것이다. 1951년에서 1953년,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경희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초라한 임시 목조교사를 쓰면서도 대학다운 대학의 역할을 고민했으며, 세계적인 대학으로의 발전을 기획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시 ‘문화세계의 창조’, 교훈, 교가, 교기, 교표 등이 피난지 부산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설립된 신생 대학이 전쟁과 화재의 혼란 한가운데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금의 경희를 지탱하는 정신과 비전을 창조해낸 것이다. 1951년에서 1953년,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도 경희는 미래를 내다보았다. 초라한 임시 목조교사를 쓰면서도 대학다운 대학의 역할을 고민했으며, 세계적인 대학으로의 발전을 기획했다.


[1954 – 1960] 기초를 세우다
1953년 11월, 경희는 회기동 일대를 대학의 부지로 확정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곳이었지만, 경희는 이곳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경희는 캠퍼스 건설의 밑그림을 마스터플랜에 담아 이 황무지를 변화시켜 나갔다.
1954년 이후부터 대학의 기초가 될 건물들이 세워졌다. 교육과 행정의 기틀이 되는 본관, 문과대학관, 체육대학관, 음악대학관 같은 여러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대학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등용문, 교시탑도 만들어졌다. 축제나 행사를 위한 대운동장, 노천극장도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1950년대는 중앙로 축선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교육 인프라를 갖춘 시기이며, 대학의 이념을 담은 핵심 조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경희의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제시한 시기였다. 한편,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 오랜 기간 공사를 진행 하였음에도 마스터플랜에서 벗어난 건축이 없었던 것은 경희인의 집념과 미래에 대한 명확한 통찰 때문이었다.

1954년 이후부터 대학의 기초가 될 건물들이 세워졌다. 교육과 행정의 기틀이 되는 본관, 문과대학관, 체육대학관, 음악대학관 같은 여러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대학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등용문, 교시탑도 만들어졌다. 축제나 행사를 위한 대운동장, 노천극장도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1950년대는 중앙로 축선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교육 인프라를 갖춘 시기이며, 대학의 이념을 담은 핵심 조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경희의 나아갈 바를 명확하게 제시한 시기였다. 한편,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 오랜 기간 공사를 진행 하였음에도 마스터플랜에서 벗어난 건축이 없었던 것은 경희인의 집념과 미래에 대한 명확한 통찰 때문이었다.








[1961 – 1970] 성장하는 경희
1960년대 경희는 의과대학을 비롯한 각종 단과대학을 신설하여 종합대학의 실질적 면모를 갖추었다. 대내적으로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설립하여 경희교육의 영역을 확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해외 대학들과 교류ㆍ협력하며 대학의 위상을 드높였다.
1968년 6월에는 8년간의 공사를 통해 완공된 중앙도서관에서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IAUP)가 개막되었다. 전 세계의 지성들이 참여한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경희는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 시기 경희는 캠퍼스의 동서 균형발전도 이루어냈다. 이전 시기에는 캠퍼스의 동쪽 영역이 집중 개발되었다면,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는 서쪽 영역에도 다양한 건물이 들어섰다. 사범대학관 (현 미술대학관), 여학생회관 (현 호텔관광대학관), 경희여중고 등이 이때 건설되었다. 또한 의약대학관, 정경대학관, 경희중고, 명상대 등을 건설함으로써 캠퍼스의 외곽 경계도 확장되었다.

1968년 6월에는 8년간의 공사를 통해 완공된 중앙도서관에서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IAUP)가 개막되었다. 전 세계의 지성들이 참여한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경희는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 시기 경희는 캠퍼스의 동서 균형발전도 이루어냈다. 이전 시기에는 캠퍼스의 동쪽 영역이 집중 개발되었다면,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는 서쪽 영역에도 다양한 건물이 들어섰다. 사범대학관 (현 미술대학관), 여학생회관 (현 호텔관광대학관), 경희여중고 등이 이때 건설되었다. 또한 의약대학관, 정경대학관, 경희중고, 명상대 등을 건설함으로써 캠퍼스의 외곽 경계도 확장되었다.






[1971 – 1980] 자리 잡은 캠퍼스
1970년대는 1960년대의 비약적 성장을 발판으로 경희대학교의 짜임새가 확고하게 자리잡는 시기였다.
1965년 인수한 동양의과대학을 바탕으로 의과대학, 한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등을 설립한 경희는 탄탄한 종합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 경희는 이전 시기 계속된 공사를 대부분 마감하며 안정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었다. 1971년에 완공된 경희의료원은 동서의학 융합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경희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문과대학 뒤편의 부지에 한의과대학 관과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현대식 기숙사 삼의원을 건설함으로써 경희의 영역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상징적인 건축물도 세워졌다. 1976년에는 평화의 전당이 착공되었고, 1979년 에는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25m 높이의 경희의 탑이 건립되었다. 고황산은 대대적인 조림ㆍ성토 작업을 통해 울창한 숲으로 변모해갔다.

1965년 인수한 동양의과대학을 바탕으로 의과대학, 한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등을 설립한 경희는 탄탄한 종합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 경희는 이전 시기 계속된 공사를 대부분 마감하며 안정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었다. 1971년에 완공된 경희의료원은 동서의학 융합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경희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문과대학 뒤편의 부지에 한의과대학 관과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현대식 기숙사 삼의원을 건설함으로써 경희의 영역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상징적인 건축물도 세워졌다. 1976년에는 평화의 전당이 착공되었고, 1979년 에는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25m 높이의 경희의 탑이 건립되었다. 고황산은 대대적인 조림ㆍ성토 작업을 통해 울창한 숲으로 변모해갔다.






[1981 – 2000] 확장되는 경희
1970년대는 경희의 내실을 다지는 한편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시기였다. 이제 서울캠퍼스만으로는 우리 대학의 확장과 발전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제2의 캠퍼스 건설계획이 수립됨으로써 경희캠퍼스는 서울과 국제 이원체제를 갖추게 된다.
국제캠퍼스는 그 이름처럼 다가올 21세기 국제화 시대를 대비한 것이었다. 1981년 5월 공과대학관 준공을 시작으로 1980년대는 기본적인 교육시설이 구축되는 기간이었다. 1990년대에는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교육시설과 지원 시설이 대부분 갖추어지며 오늘날의 국제캠퍼스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학문과 평화를 양축으로 한 경희의 비상은 캠퍼스 건설에도 반영되었다. 1984년에는 광릉캠퍼스에 ‘평화복지대학원’이 설립되어 평화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교 50주년을 맞은 1999년에는 대강당 건축을 마무리하며 그 이름을 ‘평화의 전당’이라고 지었다

국제캠퍼스는 그 이름처럼 다가올 21세기 국제화 시대를 대비한 것이었다. 1981년 5월 공과대학관 준공을 시작으로 1980년대는 기본적인 교육시설이 구축되는 기간이었다. 1990년대에는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교육시설과 지원 시설이 대부분 갖추어지며 오늘날의 국제캠퍼스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학문과 평화를 양축으로 한 경희의 비상은 캠퍼스 건설에도 반영되었다. 1984년에는 광릉캠퍼스에 ‘평화복지대학원’이 설립되어 평화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교 50주년을 맞은 1999년에는 대강당 건축을 마무리하며 그 이름을 ‘평화의 전당’이라고 지었다








[2001 – 현재] 캠퍼스에 미래를 담다
서울캠퍼스와 국제캠퍼스 모두 안정기에 접어들자 새로운 캠퍼스 건설이나 신축 공간에 대한 요구는 드물었다. 그러나 21세기 세계적인 대학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새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캠퍼스 개발 전략이 필요했다.
우선 노후화된 기존 공간에 대한 리모델링 작업이 추진되었다. 서울캠퍼스의 문과대학관, 국제캠퍼스의 외국어대학관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강의동, 기숙사 등의 건축도 있었다. 서울캠퍼스에는 푸른솔 문화관, 경영대학관, 미술관 등이 건설되었으며, 국제캠퍼스에는 제2 기숙사와 예술디자인대학관 등이 신축되었다.
그럼에도 전면적인 캠퍼스 개선사업을 통해 미래대학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2010년 5월 캠퍼스 종합개발계획인 Space 21이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우선 노후화된 기존 공간에 대한 리모델링 작업이 추진되었다. 서울캠퍼스의 문과대학관, 국제캠퍼스의 외국어대학관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강의동, 기숙사 등의 건축도 있었다. 서울캠퍼스에는 푸른솔 문화관, 경영대학관, 미술관 등이 건설되었으며, 국제캠퍼스에는 제2 기숙사와 예술디자인대학관 등이 신축되었다.
그럼에도 전면적인 캠퍼스 개선사업을 통해 미래대학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2010년 5월 캠퍼스 종합개발계획인 Space 21이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